슬럼프

대구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싸!하면서 지긋지긋한 남은 조교업무를 정리하고 인수인계할때만 해도
내 가슴만큼 작고 아담한 원룸에다가 가구를 하나하나 들여놓을때까지만 해도
대학원 오면 하루에 3~4시간만 자고 미친듯이 공부만 할꺼라 생각했었다.

워낙에 사람을 좋아하고 이벤트로 가득찬 매일매일을 보낸 덕분에
편안한 집이 있고 부를 사람이 그득그득하고 날 유혹하는 맛집과 술집들이 널린 부산땅에서는
학업에만 도저히 집중할 수 없어!라는 이유때문에
아는 사람 하나없고, 와본적이라곤 4~5번 잠깐 들려본 게 전부인
미지의 땅 대구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럼, 할 게 없고 만날 사람이 없고 갈 데가 없어서라도 미친듯이 공부에만 매진하겠지...라는 생각을 한 채...

사실,
대구에 전혀 연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다 정리하고 포기하더라도 절대 놓칠 수 없고 떠나고 싶지 않았던 그 사람이 대구에 있다는 사실이
이사를 하며 겪은 많은 경제적인 압박과 혼자라는 외로움과 2년이나 공부를 쉬어서 굳어질대로 굳어져버린 머리로 인한 두려움을
모두 잊게 해주었고
그렇게 용기를 내어서 훌쩍 대구에 왔고
좋은 실험실 사람들을 만나고 어렵지만 전공공부도 나름 재미있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한 대구 생활이었다.

그랬던 대구생활이 6개월쯤에 접어드는 지금.
절대 헤어지지 않을꺼라 생각했던 그사람과 이별을 했고,
아무도 없는 방 침대 한쪽 구석에서 밥도 먹지 않고 이불이 묵직해질만큼 눈물을 쏟으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고,
그걸 잊기 위해 연애란 걸 해봤으나 끝끝내 추억이라 부를 수 없는 기억만 늘어난 채 실패했고,
2년동안 너무 놀아버려 회전이 더딘 머리때문에 랩세미나에서 번번히 깨졌고,
마음이 잡히지 않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피하다보니 랩사람들과도 괜시리 서먹해졌고,
외롭다는 이유로 주말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 소리 들어가며 서울-부산을 우리 동네 드나들 듯 하고,
나름 빵빵했던 통장은 쥐어짜도 잉크방울 하나 안떨어질정도로 메말라버렸다.

빌어먹을.
대체 왜 이지경이 된거지?

그럴수록 더 웃으려고하고 더 시트콤을 찍어대고 더 밝게 사람들과 어울리며
괜찮아. 그래도 난 잘 살고 있는거야. 라며 자위하고 세뇌하며 버텨왔는데
그럴수록 현실은 날 비웃듯 날 옭아매고 농락하더라.

마치 번데기가 된 기분.
옴짝달싹 할 수 없이 꽁꽁 묶인 채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비바람이 불어도 그냥 맞아줄 수 밖에 없고,
그 어느 것보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오해도 바보같이 헤헤-웃으며 당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번데기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생기를 잃어갔다.
.
.
.
.
그렇게..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긴긴 슬럼프의 기간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휩쓸고 지나가고 로우포맷을 수십번해도 정리되지 않을 것만 같은 내 머릿속과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일련의 사건과 말들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기 시작했고,
서운한 감정, 미운 감정, 실망들...각종 네거티브한 감정들이 존재감을 잃기 시작했으며
앞으로의 삶에 대한 새 목표와 새 계획과 새 다짐으로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번데기에서 탈출했구나.
더이상은 이 갑갑한 번데기 안에서 상쾌한 공기와 파란 하늘을 꿈꾸며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너무나 신나고 너무나 즐겁고 너무나 설레는 그런 며칠을 보냈다.

헌데 뭔가 이상하다.
여전히 공부는 '흰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씨'상태고
여전히 랩사람들과도 어렵고
여전히 마음은 굶주려있고 몸만 살찐다.
이제 날아오를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번데기에서만 나오면 모든 게 다 잘 풀릴줄만 알았는데-
이게 뭐야! 차라리 슬럼프일때가 덜 힘들었다구!! 대체 이게 뭐야!
젠장.
젠장.
젠장.
빌어먹을.
.
.
.
.
.
아!
난 여태 곤충이 가장 약할 때는 번데기 상태라고 생각했었다-
번데기에 갇혀서 외부세력의 압박에도 도망칠 수 없고 맞써 싸울 수도 없는 번데기 상태가 가장 약하고 힘든 때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상은 곤충이 가장 많이 죽는 건 번데기에서 막 나온 상태.
죽을 힘을 다해서 껍질을 뚫고 나와 날개를 말리고 몸을 말리는 그 때가
가장 약하고 죽기 쉬운 때란다.

내가 지금 겪고있는 슬럼프보다 더 힘든 이 상태가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구나-
그 긴긴 슬럼프에서 막 빠져나왔다고 원더우먼처럼 모든 일을 다 수월하게 해치우고 누가봐도 부러워할만큼 멋지게 살아가길 기대한 게 어리석은 게 아닐까!

자기합리화의 달인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응.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몇개월이나 외면하고 살았던 턱에 영어논문이 마치 외계에서 온 편지처럼 보여도,
한동안 방황하며 전국을 쏘다닌다고 정작 가까운 랩실 사람과는 서먹해져서 견딜 수 없을지라도,
텅빈 마음을 지식으로 채우지 않고 도저히 1인분이라 불리기 힘든 갖가지 음식으로 배만 채우는 날들을 보낼지라도,
조금 더딜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날개가 다 말라서 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멋진 날개를 달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여유를 가지자. 포기하지 말자.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보란듯이 훨훨 날아줄테니!!

괜시리 날개죽지가 쿡쿡 쑤시고 근질근질해온다.
날개가 생기려나. ㅎㅎ


아! 샤워해야되지? 근질근질.


p.s- 언제나 그렇지만 글을 한번 쓰면 나에겐 스크롤 압박따위를 배려할만한 자비심이란 없다! -_-
후. 내가 써놓고도 다시 읽기 싫어지는구나 ;ㅂ;
뭐, 어짜피 사람들이 두루 읽어주고 호응해주고, 와! 잘썼어요!라고 칭찬받고 싶어서 쓰는 글이 아니니까-
그냥. 내 상태가 어떤지-
훗날 내 글들을 모아서 봤을 때, '아 내가 예전에는 저런 고민을 했구나-' '와. 되게 유치한 표현만 남발했다 ;ㅂ; 흑- 부끄러-'
라면서 보고싶기 때문이니까. ^_______^
....................................근데 적은 내가 윽- 너무 길어서 읽기 싫어!라고 하면 어쩌냔 말이다!!

p.s2- 괜히 이거 쓰다가 곤충의 변태과정에 대해서 공부만 했다. 흠. 그럼 내가 겪은 최근의 나날들은 비류연의 변태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류연의 변태과정?......변태? -_-. 쳇 문득 이상한 것이 떠올라 버렸다. 난 바바리코트가 싫다. 흥-

by 비류연 | 2007/07/05 20:23 | ┃ⓩ어쩐지우울한하루 | 트랙백 | 덧글(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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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izar at 2007/07/05 20:29
토닥토닥...
아니 좋은 일만 가득하실꺼 같더니 슬럼프인거에요..;;;
기운 내시라구요..정말로..
Commented by Naple at 2007/07/05 20:31
아가씨야 힘내라구!!
Commented by 한날 at 2007/07/05 20:34
민물 장어의 꿈.

아니,

민물 아가씨의 꿈.

.........

내 모든 걸 바쳤지만 이젠 모두 푸른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내게 남아 있는 작은 힘을 다해 마지막 꿈 속에서
모두 잊게 해줄 바다를 건너세요. 한 1000일이면 건널 겁니다.
Commented by 사바욘의_단_울휀스 at 2007/07/05 20:41
... 힘내세요...
Commented at 2007/07/05 21:0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kkommy at 2007/07/05 21:37
아마도 곧 이쁜 나비가 되어서 날아오르지 않을까..^^;
Commented at 2007/07/05 22:0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달바람 at 2007/07/05 22:12
힘내세요. 앞으로 꼭 나방이 되실겁니다(...).
Commented by TokaNG at 2007/07/05 22:20
화이팅입니다!!
기운 내세요..ㅠ.ㅠ...
Commented at 2007/07/05 22:5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7/05 22: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oldman at 2007/07/05 23:44
기운내세요 ~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는 그날까지 말이에요.
Commented by 투윤ベㅑ랑 at 2007/07/05 23:53
머..
이리저리 받히고, 치이고, 깎이다보면..
둥글둥글 잘 굴러갈때가 있답니다.
곧.. 고지가 보이네.
ㅎㅎ
Commented by 꿀맛의하늘™ at 2007/07/06 10:36
걱정마시오...어느순간, 향돈군만의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 기억으로 남을것이오....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향돈군의 성장통 이야기를..... ㅋㅋㅋ
Commented at 2007/07/07 03:1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마르스 at 2007/07/07 07:06
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醱加樂 at 2007/07/09 01:03
크르릉..

'ㅂ'/
Commented by Orchis at 2007/07/10 00:42
힘내세요. 그래도 지나고 보면 다 좋은 추억입니다...^^
Commented at 2007/07/15 14:3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TripleB at 2007/07/17 02:12
후와......스크롤의 압박이 너무 심해요;;
Commented by SUP at 2007/07/17 12:01
우연히 지나가다 들렸습니다.... 사는게 다 그런거 아닐까요..? 힘내세요. 저도 대학원생활중인데 남일 같지 않네요...
Commented by The狂爆 at 2007/07/18 14:43
대리석은 정에 쪼여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수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망치질이 한번 가해질때마다 자신의 몸이 후벼파여지는 아픔을 겪게 되죠.
하지만, 그 모든 망치질이 끝나고 정 끝이 대리석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
대리석은 그 어떤것보다도 아름다운 조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시련은 인간을 발전하게 해주고 고통은 자신의 한계를 이기게 해주는 것이라 하죠.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뤄나가세요.
주변의 것들이 하나하나 정리된 모습을 보다보면 어느새 주변에 희망이 가득찬 모습이 보이게 될 겁니다.
Commented by dasan at 2007/07/23 16:43
괜찮다 괜찮다.. 이거 계속 하시면 되요.
그리고 커피 한 잔 하시고.
대구 내려가면 미투통해서 연락드릴테니 한 번 보시죠~~
Commented by ucandoit at 2007/07/23 19:48
위로는 위로부터~
Commented by 히카리 at 2007/07/28 17:22
기운내요. 정말 마음 하나 바꾸는 걸로 기분이 전혀 달라지기도 하더라구요.
현실은 바뀌지 않더라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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